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시아 제국 해군 (문단 편집) === [[러일전쟁]] === 러시아 제국은 부동항이 언제나 절실했다. 그래도 여름이 되면 대부분의 바다는 녹아 군함들의 이동이 자유로웠지만 1년 내내 얼지 않는 부동항이 없었기 때문에 유럽보다 극동과 아시아로 눈길을 돌렸는데 본래 가지고 있던 [[블라디보스토크]]외의 항구를 원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일본 제국]]이 승리하여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条約)을 채결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독일 제국]]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삼국간섭]]을 하여 독일, 프랑스, 러시아는 조차지를 얻었지만 일본은 많은 것을 잃었다. 특히 [[러시아 제국]]과 [[청나라]] 간의 러청밀약을 맺었고 [[뤼순|뤼순항]]과 [[다롄]]을 조차하였다. 뤼순항은 러시아 제국의 전략상 중요했기 때문에 다롄과 하얼빈을 연결하는 철도길을 부설하였다. 이후 [[의화단 운동]]으로 인하여 러시아 제국은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삼사 러시아 제국 육군을 보내 만주를 사실상 지배하였다. 일본 제국은 러시아 제국을 몰아내기엔 약하다고 생각했다. 삼국간섭을 시작으로 러청밀약으로 [[러일전쟁]]이 발발했고 1904년 2월 8일 밤 [[도고 헤이하치로]](東郷 平八郎)제독이 지휘하는 일본 제국 해군은 러시아 제국에 대한 군사작전을 시작했으며, 뤼순항을 기습공격하여 해전이 일어났으며 7척의 철갑함이 격침당했다. 이공격으로 다음날 바로 전면전으로 바뀌었으며 뤼순항은 항만포위로 이어졌다. 러시아 제국 함대를 공격하려는 일본 제국 함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도했으며 해안포와 함포공격 등등이었다. 특히 1904년 4월 13일 스테판 마카로프(Степа́н Мака́ров) 제독의 전사로 항구를 떠나 바다에서 해전하는 것을 꺼렸으며 이로 인해 러시아 제국 함대는 많이 격침되었다. 또 뤼순항 해전과 더불어 제물포 해전에서도 일본 제국 함대의 기습공격으로 패배하였다. 이두 초기 해전은 일본 제국 해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러시아 제국 해군은 15척 정도를 손실입거나 잃었다. 뤼순항을 포위한 [[일본군]]은 이전의 [[청나라]]와 다르게 [[러시아 제국]]의 뤼순항을 요새화로 쉽게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로인해 일본 제국군은 육지와 바다를 포위하여 뤼순항으로의 접근을 차단한 상태로 들어갔으나, 러시아 제국은 2월 13일~14일 일본 제국 군함에 시멘트를 실은 여러 척의 배를 침몰시켰으며, 이 배들은 항해를 방해하려 했으나 너무 깊은 곳에 침몰하였다. 결과적으론 해상봉쇄는 실패하였다. 1904년 3월 스테판 마카로프 제독은 뤼순항의 봉쇄를 해제하기 위해 제1태평양함대를 지휘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공격하는 측이 기뢰를 사용했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기뢰를 사용하여 적 군함이 항구나 연안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방어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 였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 해군]]은 기뢰함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러시아 제국 해군의 군함 기동성을 크게 제한시켰고, 1904년 4월 13일 2척의 러시아 제국 기함인 전노급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Петропавловск)와 포베다(Победа)를 항구 출구에서 기뢰에 의해 폭파되었고, 페드로파블롭스크함은 빠른시간에 침몰하였고, 포베다는 작은 피해를 손상을 입어 수리를 위해 뤼순항으로 귀환했다. 페트로파블롭스크의 침몰로 마카로프 제독과 더불어 대부분의 장교와 수병들과 전쟁화가인 바실리 베레샤긴(Василий Верещагин)또한 사망하였다. 같은 시기에 러시아 제국도 5월 15일 일본 제국 해군의 전노급전함 하쓰세(初瀬)와 야시마(八島)는 뤼순항봉쇄작전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러시아 제국 해군의 기뢰부설함 아무르(Амур)의 기뢰에 격침되었다. 이때 일본 제국의 주력전함의 6척 중에 2척을 잃은 것이다. 러시아 제국은 극동과 태평양 방면 전술 합동함대인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는 일본 제국을 상대로 통상파괴작전을 벌여 많은 수송선을 격침시쳤다. 빌헬름 비트게프트(Вильгельм Витгефт)제독은 자신이 지휘하는 함대는 봉쇄를 돌파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항해하려 했지만 황해에서 공격을 받아 괴멸하였다. 뤼순항의 주둔중인 러시아 제국군은 일본군이 포병을 동원하면서 점차 함락되었으며, 해군이 방어하던 뤼순항은 1905년 1월 2일 여러차례의 공격 끝에 함락되었다. 러시아 제국 해군성은 [[발트함대]]를 보내 북해 → 도버해협 → 대서양 → 희망봉 → 인도양을 거쳐 뤼순항을 돕기 위해 항해하였다. 하지만 항해하는 도중 [[북해]]에서 [[대영제국]]의 어선을 일본 제국의 다수의 어뢰정으로 오인포격을 가하는 도거 뱅크 사건(Dogger Bank Incident)이 발생하였으며, 사상자도 발생하였다.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와 여론은 러시아 제국과 발트함대를 크게 비난하였다. (러일전쟁 당시 대영제국은 일본과 [[영일동맹|동맹]]을 맺긴 했으나 중립을 지키던 상태였다.) 더 나아가 발트함대가 피해자를 구출하지도 않고 [[도버 해협]]을 통과하자 대영제국은 순양함대를 출항시켜 추격하였고 [[스페인]]의 바고 항구까지 추격했다. 전후처리로 대영제국 내 여론은 잠재웠지만 영국 내 반러시아 감정이 강해져 발트함대에게 영국 본토와 식민지에서의 보급도 거부하였다. 이로써 발트함대가 [[동해]]까지 진출했을 때 보급도 완전하지 않고 피폐해진 상태로 바로 [[일본 제국 해군]]과의 [[쓰시마 해전]]이 터졌다. 해전 당시 일방적인 격침과 추격은 일본 제국의 전과를 올린 요인이 되었다. 또 한 발트함대가 도달하기까지의 거리와 시간이 많아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함대를 정비하고 충분한 전략을 계획할 수 있었다. 이로써 지칠대로 지친 발트함대는 [[대한해협|쓰시마 해협]]에 도달하자마자 일본 제국 해군과 마주쳐 양적이나 질적으로 높은 상태의 일본 제국 함대에게 러시아 제국 함대는 일방적으로 무력화되었다. 이로써 대부분이 격침되었고 사망하였으며, 남은 군함은 니콜라이 네보가토프(Николай Небогатов)제독 휘하에 있었고 그들은 항복하거나 중립국 항구로 가거나, 블라디보스토크로 입항했다. 결과적으로 군함은 21척을 손실하였고 10척은 격침되었다. 엔지니어 이반 부노프(Ива́н Бу́бнов)는 딜핀(Дельфин)이라는 잠수함을 만들었으며 러일전쟁에 참여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